2026-08-17 · 5분 읽기
※ 이 글은 창작 소설입니다. 1화 · 2화 · 3화 · 4화 · 5화 · 6화 · 7화 · 8화
인수인계 노트에 지워진 줄이 있었다.
볼펜으로 쓰고 볼펜으로 그은 것이라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종이를 비스듬히 기울여 형광등 아래 대봤다.
다음 달에 정기 점검 있음.
캐비닛 정기 점검은 2년에 한 번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3년 동안 두 번 있었다. 두 번 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갔고, 나는 그게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했다.
운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
박 주임님이 넘겼던 것이다. 두 번 다.
그리고 이번엔 넘길 수 없다고, 그래서 말해주려다가 지운 것이다.
나는 그 답도 알 것 같았다.
말하면 내가 결정해야 하니까. 박 주임님은 3년 동안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다.
지운 자국이 남을 걸 알면서 볼펜으로 그었다. 내가 지워진 글자를 잘 알아본다는 것도 알면서.
말해주지 않으면서 알려주는 방법을 고른 것이다.
3년 동안 나에게 해온 방식 그대로.
그날 나는 그것을 들고 지하철을 탔다.
아침에 집을 나올 때는 버릴 생각이었다. 가방에 넣고 나와서,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몇 번이나 쓰레기통 앞에 섰다.
못 버렸다.
그래서 지하철을 탔다.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었다. 4호선을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두 번인가 세 번.
버리지 못하는 물건을 들고 몇 시간을 앉아 있으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여기 두고 내리면 어떨까.
그러면 내가 버린 게 아니다. 잃어버린 게 된다. 잃어버린 건 내 책임이 아니니까.
그런데 두고 내리려다가 그것도 못 했다.
누가 주우면 어쩌지 싶었다. 쓰레기통에 버리면 쓰레기가 되지만, 좌석에 두고 내리면 그건 누군가 손에 들게 된다. 모르는 사람이 그걸 집어서 들여다보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역을 나왔을 때 비가 오고 있었다.
우산이 없었다. 그날 아침엔 맑았으니까.
비를 맞으면서 걷다가 안내판을 봤다. 분실물 보관소.
그때 든 생각은 단순했다.
저기다 맡기면 되겠다.
버리는 것도 아니고, 잃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갖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 그런 상태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박 주임님이 그랬다.
"본인 물건은 분실물이 아니에요."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창구에 놓고 나왔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확인하러 갔다. 아직 있는지.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 나오는데, 이상하게 숨이 쉬어졌다. 일주일 만에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에도 갔다. 그 다음 주에도.
이제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것은 내가 산 게 아니다. 받은 것이다.
받은 날짜가 있고, 그 날짜 다음 주에 그 사람은 없어졌다. 사고가 아니었고 병도 아니었다. 그냥 연락이 끊겼다.
전화번호가 바뀌었고, 살던 곳에서 이사를 갔고, 아는 사람들도 모른다고 했다. 그해 겨울에 나는 그 사람을 찾아다녔다. 정민석 씨가 4호선을 타고 다니는 것처럼, 나도 그런 겨울을 하나 보냈다.
봄이 되었을 때 나는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것을 볼 수 없게 됐다.
가지고 있으면 아직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그만두기로 해놓고 물건은 쥐고 있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
버리면 그 사람이 정말 없어진다. 6화에서 정민석 씨가 한 말 그대로다. 찾고 있는 동안은 아직 있는 거잖아요.
가지면 그만둔 게 아니고, 버리면 없어진다.
그래서 3년 동안 남의 캐비닛에 넣어두었다. 내 것도 아니고 없어진 것도 아닌 자리에.
이게 전부다.
대단한 사연도 아니고, 누가 죽은 것도 아니다. 그냥 어떤 사람이 나에게 뭘 주고 사라졌고, 나는 그걸 3년째 못 치우고 있다.
박 주임님이 지난주에 한 말이 맞다.
의미가 붙는 건 그 물건이 아니라 보는 사람 쪽이야.
그 물건은 아무것도 아니다. 값도 안 나가고, 남이 보면 왜 저런 걸 3년이나 두나 싶을 것이다.
7화의 그 여자가 이름표를 긁은 게 아무 사연도 아니었던 것처럼, 이것도 남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한테는 아니다.
그 차이를 3년 동안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나는 품명 칸을 비워뒀다.
정기 점검이 다음 달이다.
본사에서 나오면 캐비닛을 하나씩 열어 대조한다. 접수 번호가 없고 품명이 없는 물건은 규정상 존재할 수 없다. 그 자리에서 폐기 처리될 것이다.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 가져간다. 3년 만에 내 손으로.
둘. 품명을 적는다. 적으면 정식 접수가 되고, 6개월 뒤 처분 목록에 오른다.
셋. 점검 전에 없앤다. 내가 직접.
세 개 다 3년 동안 못 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번엔 안 고르면 남이 고른다. 다음 달에.
나는 대장 맨 뒤 페이지를 폈다.
이번 달 보류 연장을 아직 안 적었다. 며칠 남았다고 미뤄뒀는데, 이제 적을 이유가 없어졌다.
한 달 뒤에 처분될 물건에 보류를 거는 건 의미가 없으니까.
나는 볼펜을 들었다가 놓았다.
품명 칸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다음 화 — 「10화: 다시 오는 사람들」
이 소설은 창작이며, 등장하는 인물·장소·사건은 모두 지어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