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25 · 8분 읽기
※ 이 글은 창작 소설입니다. 1화 · 2화 · 3화 · 4화
계약서에서 이상한 걸 발견하는 일은 드물다.
내 계약서는 십 년 넘게 같은 양식이다. 의뢰인 이름, 작업 범위, 기간, 금액, 저작권 귀속. 다섯 줄이면 끝난다.
이번 건은 첫 줄부터 걸렸다.
의뢰인은 예순여섯 여자였다.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했다.
"제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네."
"그런데 비용은 제가 안 냅니다."
"…네?"
"제자가 냅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없는 일도 아니다. 은사 자서전을 제자가 만들어드리는 경우가 있다.
"제자분과도 뵈어야 할까요?"
"아뇨. 그쪽은 돈만 냅니다."
"…"
"계약서에 제 이름만 넣어주세요."
나는 그렇게 했다. 비용 부담자와 의뢰인이 다른 건 계약상 문제가 안 된다. 저작권은 의뢰인에게 귀속되고, 돈은 누가 내든 상관없다.
인터뷰는 순조로웠다.
사십 년 교직 생활. 시골 분교에서 시작해서 도시로. 아이들 이야기가 많았다. 기억이 정확하고 말이 정돈되어 있었다. 교사 출신 의뢰인은 대개 그렇다.
세 번째 인터뷰에서 그가 말했다.
"1988년에 분교에 있을 때, 애가 하나 있었어요."
"…"
"집이 어려워서 학교를 자꾸 빠졌어요. 제가 몇 번 데리러 갔죠."
"그 학생이 지금 비용 내주시는 분인가요?"
"네."
이런 이야기는 자서전에서 제일 좋은 자리에 들어간다.
가난한 아이를 포기하지 않은 선생, 삼십 년 뒤 은사의 책을 만들어주는 제자. 서문에 쓰기 좋고, 마지막 장에 쓰기도 좋다.
나는 그 부분을 자세히 물었다.
그런데 물을수록 이야기가 짧아졌다.
"몇 번쯤 데리러 가셨어요?"
"…여러 번이요."
"기억나는 날이 있으세요?"
"오래돼서요."
앞의 이야기들은 달랐다. 어떤 아이가 어떤 말을 했는지까지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사십 년 전 급식 메뉴도 말했다.
그런데 이 제자 이야기만 뭉뚱그려졌다.
말이 짧아지는 자리에 뭔가 있다. 3화에서 배운 걸 이번엔 잊지 않았다.
다만 이번엔 캐묻지 않았다.
3화에서 나는 캐물었고, 딸에게 전화했고, 계약이 깨졌다. 4화에서는 캐묻지 않고 모른다고만 썼다.
이번엔 다른 걸 해보기로 했다. 묻지도 않고, 넘어가지도 않고, 종이만 봤다.
의뢰인이 가져온 자료 중에 학교 문집이 있었다. 1988년 분교 문집.
거기 그 아이 글이 있을 것 같았다. 이름을 알고 있었으니까 — 계약서 비용 부담란에 적혀 있었다.
찾아봤다.
없었다.
문집 뒤쪽에 전교생 명단이 있었다. 분교라 스물세 명이었다.
그 이름이 없었다.
나는 다른 해 문집도 봤다. 의뢰인이 그 분교에 있던 4년치가 다 있었다.
네 권 어디에도 그 이름이 없었다.
하나. 전학 시기가 어긋난다. 문집은 연말에 나온다. 3월에 왔다가 가을에 전학 갔으면 명단에 없을 수 있다.
둘. 이름이 바뀌었다. 개명은 흔하다.
셋. 그 학교 학생이 아니었다.
첫 번째는 확인이 안 된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다.
세 번째만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비용 부담자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런데 의뢰인은 그쪽과 접촉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대신 통장을 봤다.
착수금이 들어와 있었다. 입금자명이 계약서에 적힌 이름과 달랐다.
법인이었다. 처음 보는 회사 이름.
등기부를 떼봤다.
2019년 설립. 대표이사 이름이 계약서 비용 부담자와 같았다.
여기까지는 이상할 게 없다. 회사 돈으로 낸 것뿐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사업 목적란을 봤다.
출판업, 서적 도소매업, 저작권 중개업.
출판사였다.
나는 계약서를 다시 읽었다.
저작권 귀속 조항이 있다. 완성 원고의 저작권은 의뢰인에게 귀속된다. 내 양식에 십 년째 들어가 있는 문구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의뢰인이 저작권을 갖는다는 건, 의뢰인이 그걸 누구에게든 넘길 수 있다는 뜻이다.
"선생님, 이 책 어디서 내실 계획이세요?"
"…제자가 알아서 한다고 했어요."
"그분 출판사가 있으시더군요."
의뢰인이 나를 봤다.
"…그래요?"
모르는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그걸 알아볼 수 있다. 십 년 넘게 사람 앞에 앉아서 말을 받아 적는 일을 했다.
"선생님."
"…"
"그분, 제자 맞으세요?"
"…삼 년 전에 연락이 왔어요."
의뢰인이 손을 무릎에 놓았다.
"자기가 제 제자라고. 저는 기억이 안 났어요."
"…"
"그런데 학교 이름도 알고, 제 별명도 알고, 그때 있었던 일도 알더라고요."
"…"
"그래서 그런가 보다 했죠. 사십 년인데 제가 어떻게 다 기억해요."
"책 얘기는 언제 나왔어요?"
"작년에요. 선생님 이야기가 아까우니 책으로 남기자고."
"비용도 그쪽이 대겠다고 하고요."
"네."
"…저작권은요?"
의뢰인이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
"…계약서를 하나 썼어요. 그쪽하고."
그가 가져온 계약서는 세 장이었다.
출판 계약서. 통상적인 양식처럼 보였다. 인세 조항도 있었다.
그런데 뒤쪽에 한 조항이 있었다.
저작재산권 일체를 갑에게 양도한다.
갑은 출판사였다.
인세 조항은 그 앞에 있었다. 양도한 저작권에 인세가 붙을 리 없다. 앞 조항과 뒤 조항이 서로를 취소한다. 그런데 읽으면 인세를 받는 것처럼 읽힌다.
나는 이 사람이 왜 표적이 됐는지 생각해봤다.
사십 년 교사. 정년퇴직. 자녀 없음. 이건 인터뷰에서 들었다. 그리고 기억이 좋고 말이 정돈된 사람이다.
이야기가 좋은 사람이다.
교사 회고록은 시장이 있다. 잘 만들면 팔린다. 그리고 이 사람의 사십 년은 실제로 좋은 이야기였다. 내가 세 번 인터뷰하면서 확인했다.
그러니까 이건 이런 일이다. 이야기가 좋은데 지킬 사람이 없는 노인을 찾아서, 제자를 자처하고, 비용을 대주는 척하면서 저작권을 가져가는 것.
증명할 수는 없다. 진짜 제자일 수도 있다. 계약서가 불리한 건 사실이지만 불법은 아니다.
나는 또 증명하지 못했다.
나는 계약을 계속했다.
대신 두 가지를 했다.
첫째, 완성 원고를 의뢰인 본인에게 직접 넘겼다. 출판사가 아니라. 계약서에 그렇게 되어 있었으니 내 권한 안이다.
둘째, 원고 마지막에 부록을 하나 넣었다.
이 원고의 저작권은 ○○○에게 있습니다. 저작권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계약을 이미 체결하셨다면, 그 계약이 유효한지 변호사와 상담하시기를 권합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은 무료입니다.
맞다. 아니다.
나는 남의 인생을 쓰는 사람이지 법률 상담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3화에서 의뢰인이 나에게 한 말이 정확히 그거였다.
왜 자꾸 본인 생각을 넣습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넣었다.
다만 이번엔 본문에 안 넣었다. 부록에 넣었다. 본문은 그가 말한 그대로 썼다.
그 사람의 이야기와 내 판단을 같은 자리에 두지 않는 것.
이번에 내가 찾은 방법은 그거였다.
책이 나왔는지는 모른다.
의뢰인에게 원고를 넘긴 게 마지막이었다. 잔금은 법인 계좌에서 들어왔고, 그 뒤로 연락은 없었다.
부록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캐비닛을 열었다.
첫 장만 쓰인 원고.
12월까지 석 달 남았다.
오늘 나는 자기 이야기를 지킬 방법이 없는 사람을 봤다. 이야기가 좋아서 표적이 된 사람.
내 원고에 나오는 사람은 그 반대다. 지킬 방법이 아주 많은 사람이고, 지금 그걸 쓰고 있다.
나는 부록을 쓸 수 있는데 본문을 못 쓴다.
남한테는 상담을 받으라고 써놓고.
다음 화 — 「6화: 같은 사람을 두 번 쓰다」
이 소설은 창작이며, 등장하는 인물·장소·사건은 모두 지어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