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필」 1화 — 사진 뒷면이 비어 있던 3년

2026-08-21 · 10분 읽기

※ 이 글은 창작 소설입니다. 매주 한 편씩 이어집니다.


나는 남의 인생을 쓴다.

자서전 대필이라고 하면 대개 유명한 사람을 떠올리는데, 실제 의뢰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평생 철물점을 한 사람, 아이 넷을 키운 사람, 회사에서 삼십 년을 버틴 사람. 손주에게 남기려고, 죽기 전에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내 이름은 책에 안 들어간다. 계약서에 그렇게 되어 있다.

이백 장

그날 의뢰인은 사진 상자를 들고 왔다.

여든둘. 성함은 남기지 않기로 했으니 그냥 어르신이라고 쓰겠다. 갈색 점퍼에 중절모를 쓰고, 등이 굽었는데도 상자를 직접 들고 왔다.

계약서를 드렸을 때 그는 한참 들여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어디다 쓰면 되오?"

나는 서명란을 손가락으로 짚어드렸다. 노인들은 서류를 어려워하니 흔한 일이다. 나는 그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거면 되겠소?"

이백 장쯤이었다. 흑백에서 컬러로 넘어가는 시기가 상자 안에 다 있었다.

대필 작업에서 사진은 금맥이다. 사람은 말로 하면 순서가 엉키는데, 사진을 보면 그 자리로 돌아간다. "아 이건 그때"라고 하면서 말이 저절로 풀린다.

그런데 이 상자는 좀 달랐다.

사진 뒷면에 전부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1968.4. 청계천. 1971.10. 처가. 1979.5. 큰애 소풍.

이백 장 전부. 이렇게 정리된 자료는 십 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처음이었다.

3년

그런데 비어 있는 것들이 있었다.

나는 사진을 연도순으로 늘어놓다가 알아챘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그 시기 사진만 뒷면이 백지였다. 열일곱 장.

앞뒤로는 다 적혀 있었다. 1973년까지 적혀 있고, 1977년부터 다시 적혀 있다. 그 사이 3년만 없다.

나는 그 열일곱 장을 따로 뺐다.

사진 자체는 특별할 게 없었다. 가족 사진, 나들이, 돌잔치.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비어 있는 자리를 자주 만난다.

의뢰인들은 대개 인생의 한 구간을 건너뛴다. 사업이 망한 해, 이혼한 해, 감옥에 있던 해. 말로는 "그때는 뭐 별일 없었지"라고 하는데, 그 별일 없는 해가 인생에서 제일 시끄러운 해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읽었다.

1974년부터 3년 동안 뭔가 있었다. 그래서 날짜를 안 적었다. 적으면 남으니까.

십 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배운 게 그거다. 사람은 남기고 싶지 않은 걸 기록하지 않는다.

나는 그날 인터뷰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1975년쯤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어르신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때가… 옥수동 살 땐가."

"뭐 특별한 일은 없으셨고요?"

"없었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있구나.

두 번째 인터뷰

일주일 뒤 두 번째 인터뷰에서 나는 그 열일곱 장을 꺼냈다.

"어르신, 이 사진들은 뒷면이 비어 있는데요."

어르신이 사진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뒤집어 봤다.

"…그러네."

"혹시 이때 일은 기억 안 나세요?"

"기억나지. 여기는 남한산성이고, 이건 큰애 학교고."

그가 사진을 하나씩 짚으면서 말했다. 막힘이 없었다. 날짜까지 말했다.

"1975년 봄이야, 이건. 진달래 폈잖아."

한 가지 걸리는 게 있긴 했다. 그는 사진을 한 번도 뒤집지 않았다. 뒷면에 날짜가 적혀 있는데도, 앞면만 보고 말했다.

기억이 좋은 분이구나 싶었다. 나는 그렇게 적어두고 넘어갔다.

나는 볼펜을 멈췄다.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정확하게.

그런데 안 적었다.

앞뒤가 안 맞는다

기억하는데 안 적은 것이다.

숨기려고 안 적은 거라면 기억도 흐리게 말했을 것이다. 사람은 숨기고 싶은 걸 물어보면 말이 짧아진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3년을 제일 자세히 말했다.

나는 그날 밤 열일곱 장을 다시 봤다.

그리고 다른 사진들과 나란히 놓고, 뒷면 글씨를 봤다.

글씨

이백 장의 글씨는 전부 같은 사람 것이었다.

같은 필체, 같은 볼펜, 같은 필압. 세월이 흐르면 글씨가 변하는데 이건 그렇지 않았다. 1968년 것과 1995년 것이 똑같았다.

한 번에 쓴 것이다.

이백 장을 어느 시점에 쭉 앉아서, 기억을 더듬어가며 한꺼번에 적은 것.

문제는 그게 누구 손인가였다.

여기서 나는 조심해야 했다. 나이가 들면 글씨는 흔들린다. 그러니 뒷면 글씨가 반듯하고 어르신 서명이 삐뚤다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예순에 몰아서 썼다면 반듯한 게 당연하고, 여든둘의 손과도 얼마든지 같이 간다.

그래서 나는 다른 걸 봤다.

받침이 빠져 있었다.

정확히는 받침 자리에 획이 하나씩 없었다. 청계천청계처으로, 큰애 소풍큰애 소푸으로.

전부는 아니었다. 열 장에 한 장쯤. 그런데 빠지는 자리가 일정했다. ㅇ과 ㄴ 받침에서만.

이건 손이 떨려서 생기는 게 아니다. 손이 떨리면 획이 삐뚤어지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글자를 끝까지 안 배운 사람의 습관이다.

그리고 어르신은 계약서에 이름 석 자를 썼다. 받침을 하나도 안 빼고.

나이와 무관한 특징이 어긋난다. 그러니 사진 뒷면을 쓴 사람은 어르신이 아니다.

세 번째 인터뷰

"이 글씨, 어르신이 쓰신 게 아니죠?"

어르신이 나를 봤다.

"…어떻게 알았소."

"받침이 자꾸 빠져 있어서요. 그런데 어르신은 계약서에 받침 다 쓰셨잖아요."

어르신이 한참 있다가 말했다.

"집사람이 썼지."

"…"

"내가 못 쓰니까."

못 쓴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손이 불편하셨어요?"

"아니."

어르신이 중절모를 벗어 무릎에 놓았다.

"나는 글을 못 읽어."

이름 석 자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계약서가 떠올랐다.

어디다 쓰면 되오?

나는 그때 손가락으로 서명란을 짚어드렸다. 노인들은 서류를 어려워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는 서류를 어려워한 게 아니었다. 어디가 서명란인지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진을 한 번도 뒤집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뒤집어도 읽을 게 없으니까.

그가 반듯하게 쓴 건 이름 석 자뿐이었다. 그것만 배운 것이다. 평생 그것만 쓰면 됐으니까.

받침이 빠진 글씨는 배우다 만 사람의 것이라고 나는 읽었다. 맞는 말이었다. 다만 그게 덜 배운 쪽이 아니라 더 배운 쪽이었다.

이 집에서 글을 아는 사람은 아내였다.

그 3년

이해가 되는 데 몇 초 걸렸다.

"…국민학교를 못 다니셨어요?"

"세 달 다녔지. 그러고 나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가 사진 상자를 봤다.

"집사람이 나중에 다 적어줬어. 애들 다 키우고 나서, 한 번에. 내가 나중에 손주들한테 보여줄 때 헷갈리지 말라고."

"…"

"근데 저 3년치는 못 썼지."

"왜요?"

"그때 사진은 나중에 나왔거든. 처제가 갖고 있던 걸 재작년에 줬어. 집사람 죽고 나서."

그래서 비어 있었다

숨긴 게 아니었다.

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백 장 중 백여든세 장은 아내가 살아 있을 때 정리한 것이고, 열일곱 장은 아내가 죽은 뒤에 생긴 것이다. 그래서 뒷면이 비어 있다.

거기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어줄 사람이 없어서.

나는 십 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배운 걸로 그걸 읽었다. 사람은 남기고 싶지 않은 걸 기록하지 않는다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게 답이 아니었다.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하나뿐인 건 아니다.

왜 자서전인가

"그런데 어르신."

"응."

"글을 못 읽으시면, 책이 나와도 못 읽으시잖아요."

어르신이 웃었다.

"내가 읽으려고 만드나."

"…"

"손주가 읽어주면 되지."

그가 상자 뚜껑을 닫았다.

"집사람이 사진 뒤에 적어놓은 거, 그거 손주가 읽어주는 걸 들었어. 몇 년 전에."

"…"

"그때 생각했지. 사진 뒤에 몇 글자 적어도 이런데, 책 한 권이면 어떻겠나 하고."

계약서

나는 그날 계약서를 다시 썼다.

원래 조건에는 원고를 이메일로 보내고 출판사에 넘기는 것까지만 되어 있었다.

거기에 한 줄을 넣었다.

완성 원고는 음성 파일로도 제작한다.

추가 비용은 받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읽어서 녹음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건 왜?"

"손주분이 매번 읽어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어르신이 계약서를 봤다. 못 읽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걸 그의 앞에 놓았고, 그는 한참 그걸 봤다.

"…고맙소."

그날 밤

작업실에 돌아와서 나는 열일곱 장을 다시 꺼냈다.

뒷면이 비어 있는 사진들.

나는 볼펜을 들었다가 놓았다.

내가 적을 수는 없었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나는 남의 인생을 쓰는 사람이지만, 이 열일곱 장은 원고가 아니라 사진 뒷면이다.

그건 그 집 사람이 쓰는 자리다.

그리고

작업실을 나오려는데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출판사였다. 내가 아는 편집자고, 일곱 번쯤 같이 일했다.

선생님, 이번에 한 분 자서전을 맡게 됐는데요. 혹시 아시는 분일까 해서 여쭙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화면을 오래 봤다.

집필은 다른 작가님이 맡기로 했고, 12월 출간 목표입니다. 자료 조사 중에 선생님 성함이 나와서요.

12월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을 덮고 책상 아래 캐비닛을 열었다.

거기 원고가 하나 있다. 표지도 제목도 없고, 첫 장만 쓰여 있다.

의뢰받은 것도 계약서도 없다. 쓸 이유가 없어서 안 쓴 게 아니라,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안 쓴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쓴다.

내가 안 쓰면, 그 안에서 나는 그 사람이 쓴 대로의 사람이 된다.

12월까지 넉 달이다.


다음 화 — 「2화: 동업자를 지워달라는 의뢰」

이 소설은 창작이며, 등장하는 인물·장소·사건은 모두 지어낸 것입니다.